* 본 촬영은 방역지침을 준수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순탄한 시청 생활을 포기하고,
서울 진출을 위해 다시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습니다.
결과는 또 합격. 그렇게 전남도청에서 일한 지 3년쯤 지났을 때
기적처럼 서울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일찍 알아버린 건강의 소중함
임영미 씨의 어머니는 어릴 적부터 자식들에게 “여성도 전문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분이었습니다.
그런 어머니 덕분에 대학 입학과 동시에 미래를 설계했습니다.
3학년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해 졸업을 앞둔 4학년, 고향인 순천 시청에 9급 공무원으로 합격했습니다.
당시엔 동사무소였던 곳에서 등·초본을 떼는 일이 그가 맡은 첫 커리어였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사회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임영미 씨는 결혼하고 귀여운 아이 둘을 낳았습니다. 하지만 임신 과정에서 임신중독증이 생겨
둘째를 낳고 두 돌이 채 지나지 않아 신장이 완전히 망가졌습니다.
단순히 잠시 아프고 회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하루아침에 장애인 등급을 판정받고, 후유증으로 시력까지 잃어갔습니다.
설상가상 공황장애까지 겹쳐 새벽마다 병원 응급실로 달려갈 정도로 공포의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셋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서울의 큰 병원에 갈 수밖에 없었어요.
혈액 투석을 한 뒤부터 시력도 괜찮아졌어요. 1년 뒤 가족에게 신장 이식을 받았죠.
지난 1월로 꼭 20년 됐어요.”
이식 후 임영미 씨는 순천시청에서 일하며 서울의 병원을 주기적으로 다녔습니다.
하지만 매번 서울을 다녀오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비나 눈이라도 오면 비행기가 취소되기 일쑤였죠.
3개월 전부터 잡아 놓은 의사와의 회진은 멀리 사는 그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왔습니다.
처음으로 “서울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순탄한 시청 생활을 포기하고, 서울 진출을 위해 다시 공무원 시험에 도전했습니다.
결과는 또 합격. 그렇게 전남도청에서 일한 지 3년쯤 지났을 때 기적처럼 서울로 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직업상담사나 전직지원 컨설턴트를 희망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일 할 수는 없어요.
관련 경험과 경력을 쌓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해요.
입문을 위해서는 역량을 갖출 수 있는 공부가 미리 되어야 해요.
결국 교육과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죠.
목표를 향한 거침없는 도전
얼마나 간절한 바람이어야 이루어지는 걸까요? 서울에 자리한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에서
임영미 씨를 호출한 것입니다. 운명처럼 서울로 파견돼 꿈만 같은 1년을 보냅니다.
하지만 파견은 3년이라는 유효기간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임영미 씨는 최대한 빨리 서울에 자리를 잡기 위해 고민 끝에 1:1 인사교류를 신청합니다.
그렇게 2009년 9월, 고용노동부 서울 동부고용센터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됩니다.
“저는 공무원으로서 탄탄대로를 걷거나, 승진을 잘하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다만 수평 전환을 위해 노력했고, 그것이 이뤄졌던 것이죠. 이후 6년간 열심히 일했다고 자부해요.
기획, 교육, 강의, 사내 CS 리더 등의 다양한 일을 하다 2015년 명예퇴직했어요.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죠.”
하지만 임영미 씨는 이 시점을 두고 “쉬어야 할 타이밍에 쉬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위해 잠시 내려 두고 다음 스텝을 준비했어야 하는데 말이죠.
무슨 생각이었는지 모두가 반대한 프렌차이즈 편집숍을 오픈했고, 딱 8개월이 지난 후 정신이 번쩍 듭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잘하는 건 이게 아닌데.”
그렇게 8개월간의 방황을 마치고 편집숍을 폐업한 임영미 씨는 더는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았습니다.
고용노동부에서 일한 임영미 씨만큼 고용노동부의 교육 프로그램을 잘 아는 사람은 없었을 테니까요.
그는 자신의 장기를 살려 컨설턴트로서 새로운 시작을 하고자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고용노동부에 있는 청년 취업 지원 강사 양성 과정을 비롯해 NCS취업 역량 강사 양성과정,
취업희망 강사 양성 과정, 직업심리검사 전문가 과정 등의 다양한 교육을 수료했습니다.
고용노동부와 워크넷이 도운 뉴스타트
여성 공무원이 퇴직 후 다른 직종으로 전직한 경우는 흔치 않습니다.
임영미 씨가 7년째 전직지원 컨설턴트로서 일할 수 있는 배경에는 집중적인 재교육과 인생 재설계를 위한 꾸준한 노력,
그리고 본인의 실패와 경험이 있었습니다.
“직업상담사나 전직지원 컨설턴트를 희망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격증이 있다고 해서 누구나 일 할 수는 없어요.
관련 경험과 경력을 쌓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해요. 입문을 위해서는 역량을 갖출 수 있는 공부가 미리 되어야 해요.
결국 교육과정을 받는 것이 중요하죠. 저는 지금 대기업임원만을 대상으로 전직 지원 컨설팅을 하고 있지만,
퇴근 후에도 생애설계 세미나나 온라인 교육을 성실하게 들어요.”
무엇보다 임영미 씨가 적극 이용했던 것은 고용노동부의 취업플랫폼 ‘워크넷’이었습니다.
워크넷을 통해 구직등록을 했고 취직도 했습니다. 1인 기업으로 법인을 냈지만,
곧바로 코로나 19가 터지고 힘들어 하던 때에도 워크넷을 통해 대학교 취업컨설턴트로 근무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 후반전에는 늘 워크넷이 함께했습니다.
“워크넷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능이 있어요.
구직등록은 물론 성인직업심리검사를 통해 본인을 다시 돌아볼 수도 있죠.
퇴직 후 무언가 해보고 싶다면 고용센터에 가서 상담을 미리 받아보는 것도 추천해요.
직업전환을 위한 끊임없는 학습을 해야 하고, 고용노동부에선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이를 실현할 수 있어요.”
임영미 씨는 본인의 인생을 ‘오답노트’로 표현합니다. 전직 지원 컨설턴트로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고 있는 데는,
그 역시 똑같은 방황과 고민을 겪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험난한 과정을 이겨내 온 그의 오답노트는 인생 후반전의 교과서가 되었습니다.
“자리를 생각하면 퇴직 후 할 수 있는 일은 많이 없습니다. 자존심을 내세우는 분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해요.
직책과 자리를 내려놓고 내가 할 수 있는 직무만을 보고 준비하세요.
고령자 재취업이 쉽진 않지만, 그럼에도 겸손한 자세로 젊은 사람들과 소통하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