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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간 잘하는 것에 매진해 온 윤현숙 씨에게 ‘잘하고 싶은 것’이 생겼습니다.
농인(청각장애인)과 청인(비장애인) 사이에서 소통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수어’가 바로 그것입니다.
퇴직 후 새로운 도전의 길에 나선 그는 수어에 대한 애정과 남다른 뚝심으로
자신만의 수어 통역 경력을 착실히 쌓아나가고 있습니다.
글강진우 / 사진김지원
우수 은행원, 수어를 꿈꾸다
열세 살 소녀였던 윤현숙 씨 옆자리에 한 아이가 앉았습니다. 덩치는 컸지만 다리 한쪽이 불편한 친구였습니다. 6학년 내내 그 아이의 일상을 도우며 느낀 보람과 즐거움은 특수학교 교사라는 새로운 꿈으로 꽃피었습니다. 하지만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으로 인해 대학교 진학 대신 은행 취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비록 스스로 원한 길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은행 업무는 윤현숙 씨의 적성에 잘 맞았죠. 1991년 입사 후 27년 동안 고객자산관리를 담당하며 부서에서 꼭 필요한 인재로 거듭났습니다. 이런 가운데 2013년, 그의 머릿속에 수어’라는 단어를 각인시킨 일이 생겼습니다. 농인 고객이 금융 상담을 위해 그를 찾아온 것입니다.
“농인 고객을 처음 응대하다 보니 여러 가지로 서툴고 힘든 부분이 많았어요. 어려운 금융 용어를 명쾌하게 설명해 드리지 못해 답답했고, 업무에도 좀처럼 속도가 붙지 않았죠. 결국 그 고객은 원하던 상담을 모두 마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셨는데요. 그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내가 수어를 할 줄 알았다면 상담이 원활했을 텐데’하는 아쉬움을 진하게 느꼈어요. 이후 구청에서 진행하는 수어교실에 등록해서 수어를 배우려고 했지만, 업무와 병행하다 보니 쉽지 않았어요. 결국 인사 정도만 배우고 잠시 수어를 내려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어를 배우고 싶다는 열망은 사그라들지 않았습니다. 2018년 1월 희망퇴직 공고를 마주한 윤현숙 씨는 가족들과 미래를 상의했습니다. 그동안 잘하는 것을 했으니, 이제는 잘하고 싶은 것에 매진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죠. 그의 결심을 들은 가족들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덕분에 윤현숙 씨는 한결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직서를 제출할 수 있었습니다.
수어로 전하는 올바른 금융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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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에 종사하던 윤현숙 씨가 수어를 배우겠다고 나서자, 갑작스러운 진로 선회에 걱정을 표하는 주변인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농인들에게 올바른 금융지식을 전하는 수어통역사’라는 분명한 목표를 품고 있었습니다. 비장애인과의 원활한 소통이 쉽지 않기에 상대적으로 금융지식이 부족한 농인들이 이로 인해 불이익과 피해를 보는 상황이 안타까웠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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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농인이 농인을 대상을 수백억 원 규모의 사기 행각을 벌인 이른바 ‘행복팀 사기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분들에게 올바른 금융지식을 전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마침 수어에 관심이 있는 제가 이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무척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죠. 이렇듯 분명한 목표를 품고 퇴직했고, 곧바로 서울수어전문교육원에 다니기 시작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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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수어를 한국어의 연장선상 정도로 쉽게 생각하지만, 알고 보면 외국어에 가깝습니다. 표현 방법과 언어 문화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인데요. 그렇기에 윤현숙 씨도 수어를 익히는 데 무척이나 애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자발적으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힘들수록 성취감과 즐거움도 커졌습니다. 열심히 수어를 공부하는 와중에도 농인들에게 금융지식을 쉽고 빠르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는데요. 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에서 ‘1인 크리에이터 양성과정’ 모집 공고가 눈에 들어온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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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로 금융지식을 설명하는 영상을 만들어 유튜브에 올리면 더 많은 농인들에게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어요. 그 길로 ‘1인 크리에이터 양성과정’에 신청서를 제출했고, 2018년 8월에 과정을 이수했죠. 이후 ‘윤쌤의 쉬운 금융수어’라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한 달에 한두 편씩 꾸준히 영상을 업로드하고 있어요. 아직 국가 공인 수어통역사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했기에 홍보를 안 하고 있지만, 자격증을 취득하는 대로 많은 분들에게 채널을 알려서 농인 분들이 금융지식을 익히는 데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생각이에요.”
열정과 도전으로 증명한 ‘청춘’
27년간 은행에서 일한 금융권 베테랑이지만, 농인들에게 보다 정확한 지식을 전하기 위해서는 꾸준히 금융지식을 갈고 닦아야 했는데요. 윤현숙 씨는 이러한 갈증도 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를 통해 풀었습니다. ‘금융’이라는 글자가 붙은 교육과정을 대부분 수강한 겁니다. 덕분에 퇴직 후에도 금융 관련 지식과 현안을 면밀하게 파악할 수 었다는 것이 그의 설명입니다.
“현재 노사발전재단 서울센터에 계시는 민기정 소장님이 당시 금융센터 컨설턴트로 활동하시면서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어요. 특히 ‘끊임없이 공부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알리라’던 말씀은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죠. 이에 용기를 얻은 저는 특수학교 코딩 수업 보조강사 모집 공고를 보자마자 망설임 없이 지원했고, 작년 10월부터 두 달간 국립서울농학교 보조강사로 일하며 귀중한 수어 통역 경험을 쌓을 수 있었어요.”
코딩 수업이 코로나19로 인해 두 달 만에 중지됐지만, 윤현숙 씨는 낙담하지 않았습니다. 서울수어전문교육원에서 인연을 맺은 수어 스승의 추천으로 서울시 양천구수어통역센터에 이력서를 제출했고, 1월 초부터 농통역사의 업무를 돕는 근로지원인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농통역사는 그동안 농인으로서 직접 체득한 몸동작이나 표현법을 바탕으로, 수어를 모르는 농인들의 의사를 해석해 청인들에게 전달해 주는 역할을 하는데요. 저는 양천구수어통역센터 농통역사의 근로지원인으로서, 농인•농통역사•비장애인 사이에서 수어 통역을 담당하고 있어요. 노사발전재단금융센터와 함께한 지난 3년간의 노력이 조금씩 결실을 맺고 있는 것 같아 뿌듯합니다!”
2년 전 국가 공인 수어통역사 필기시험에 합격한 윤현숙 씨는 일하는 틈틈이 올 가을에 있을 실기시험 준비에도 만전을 기하고 있습니다. 이후 강의, 상담, 유튜브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농인들에게 금융지식을 전달하는 수어통역사의 길을 걷고 싶다는 윤현숙 씨. 꿈과 열정을 바탕으로 성실히 도전의 길을 걷고 있기에, 그는 여전히 푸르른 청춘입니다
“꿈을 잃지 않고 도전하는 윤현숙 님을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