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여성 최초가 아닌 프로페셔널을 꿈꾸며
앵글 속 세상을 펼치다
‘야구는 9회말 2아웃부터’라는 말처럼 끝날 때까지는 결과를 알 수 없습니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남은 한 번의 기회가 어떤 변화를 불러올지 알 수 없을 때, 우리는 구원 투수 등판을 기다리게 될까요? 아니면 직접 타석에 들어서서 역전 드라마를 만들어 나가는 길을 택할까요? 이런 치열한 고민을 하는 선수들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 앵글을 쫓아 연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여성 최초 프로야구 메인 디렉터 정효진 PD입니다.
Q. sky KBS 공채 1기로 입사하셨는데요.
2001년 sky KBS 공채 1기 제작팀 PD로 입사했어요. 프로야구, 프로축구, 복싱, 이종 격투기 등에서 중계 조연출(현장 슬로모션 제작)을 맡았어요. 최근 아시안게임에서 브레이킹 남자부 은메달을 획득한 ‘홍텐’ 김홍열 선수, 진조 크루 ‘윙’ 김현우 선수와 유럽을 돌며 비보이 프로그램 연출도 했었어요. 함께 했던 친구들이 국가대표로서 국제적인 자리에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갑더라고요. ‘아이 러브 베이스 볼’ 초창기 메인 PD도 하면서 입사 후 계속 스포츠제작팀에서만 일하다 입사 10년 차 정도 되었을 때 예능 채널 KBS JOY 채널로 자리를 옮겨 편성 업무와 예능 프로그램 프로듀서 경험도 했어요.
Q. 나이나 성별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능력을 펼쳐 여성 최초 프로야구 메인 디렉터가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무엇인가요?
8-9년차에 복싱과 이종격투기 종목 메인 PD로 데뷔한 상태에서 출산을 했어요. 복직한 뒤에는 디지털콘텐츠팀으로 발령받아서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했어요. 아이랑 추억을 많이 가져야 한다고 말이죠. 아무래도 스포츠는 지방 경기로 인한 출장이 잦으니까 팀장님이 배려해주신 거죠. 그렇게 6년 정도 하다가 다시 스포츠제작팀으로 발령받은 시기가 2021년 초였어요. 독일 분데스리가 위성 생중계를 시작으로 미식 축구 리그 한 시즌을 마쳤더니 팀장님이 프로야구 메인 PD를 할 수 있겠냐고 물으셨어요. 전 실력이 없어서 안 될 것 같다고 바로 말씀드렸죠. 엄마이자 아내인 제가 1년의 반은 출장으로 가정을 비우게 될 상황을 걱정해 주셨던 팀장은 제 대답에 “그럼 그냥 해”라고 하셨어요.
프로야구 메인 디렉터는 15년 정도는 돼야 하는데 23살에 입사했더라도 15년차면 38살이죠. 대부분은 결혼을 했거나 아이가 있어서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겠죠. 프로야구는 주 6일 경기가 이어지고, 지방 경기가 많기 때문에 출장이 일상이죠. 그렇기에 여성 메인 PD가 나오기 쉽지 않은 종목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내가 할 수 있을까?”라고 엄마한테 말했더니 20여 년 동안 해왔던 일을 포기하면 안 된다고 하시더라고요. 남편도 기회가 있으면 해야 한다며 응원해 줬고요. 그렇게 온 가족의 도움으로 시작해서 해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Q. 여성 최초라는 수식어가 부담스럽지는 않으신가요?
요즘엔 남녀 평등이지만 혹시라도 여성 최초니까, 여자 PD라서 부족하다는 말이 나와서 도미노처럼 후배들이 피해를 보진 않을까 걱정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잘해서 한국 프로야구 방송의 장을 열겠다는 원대한 포부보다는 ‘잘하기 보다는 못하지만 말자, 정말 실수만 하지 말자’는 다짐을 계속했던 것 같아요
Q. 스포츠 선수들 대부분 경기 시작 전 자신만의 루틴이 있다고 하는데요. PD님도 방송(경기 시작 전) 전 루틴이 있으신가요?
정말 원초적인 답변이 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경기가 시작되면 3~4시간 넘게 화장실에 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서 커피나 물은 마시지 않는 편이에요. 최근에 생긴 루틴이 있는데, 경기 시작 1시간 전부터는 혼자서 경기장 한 바퀴를 돌고 와서 중계차에 앉아서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요. 이 시간을 통해 에너지 충전도 하고, 시작될 경기 중계에 대한 정리도 할 수 있어서 버릇처럼 하고 있어요.
Q. 중계방송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화면으로 보여지게 되나요?
프로야구 중계는 현장과 스튜디오에서 제작되어 시청자들에게 전달해요. 현장에서는 10여 대의 카메라가 연결된 중계차에 디렉팅 PD, 슬로모션 제작 PD, 기술감독, 오디오 감독, 비디오 감독, 송출 담당 감독이, 야구장에서는 카메라 감독, 캐스터, 해설위원, 현장기록원이 있어요. 카메라 감독들이 현장에서 각자 맡은 장면을 촬영하면 연결된 중계차에서 상황에 맞게 디렉팅 PD가 그림을 잘라 영상을 만들고 중요한 상황은 슬로모션 PD가 만든 느린 화면을 넣어요. 동시에 캐스터와 해설의 중계해설이 입혀지며 스튜디오로 전달되는데요. 기술팀이 현장에서 수신된 영상에 코더 자막과 기록 그래픽을 추가하면 시청자들이 볼 수 있는 프로야구 중계가 완성되는 거죠.
Q. 선수 부상, 밴치 클리어링 등 스포츠의 특성상 방송에 부적절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특히 신경쓰는 부분이 있다면?
처음에는 선수들이 벤치 클리어링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무섭기도 했어요. 벤치 클리어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상황이거든요. 그래서 팀장님, 선배들한테 물어보면서 대처하는 방법을 배웠어요. 우선 팬들이 알 권리가 있어야 하니까 전체 화면으로 선수들이 우르르 나오는 장면을 보여주고, 그 다음 상황을 차례로 보여줘야 하는 거죠. 선수가 욕을 한다거나 거친 행동을 보이는 장면은 되도록 화면으로 보이지 않게 해요. 혹시나 선수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리고 선수가 부상을 당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예요.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 보여줘야 하지만, 그렇다고 디테일하게 반복해서 보여주진 않죠. 그 장면을 선수 가족이나 친구들이 본다면 얼마나 끔찍하겠어요. 선수에게도 트라우마가 될 수 있을테니까요. 야구인들의 마음을 엄마의 마음으로 들여다보려고 노력하는 편이에요.
Q. 매년 야구 시즌이 진행되는 만큼 변화에 민감할텐데 시즌 시작 전 특별히 준비하고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이 있다면?
아무래도 시즌을 시작할 때마다 부담이 많이 돼요. 되게 뻔한 변화는 자막 디자인이고요. 코더는 한 번 정해지면 시즌 내내 똑같은 위치에서 보여져야 하는 거라 코더 위치에 대한 회의를 많이 해요. 그리고 해설위원님들과 해설 스타일을 어떻게 할지도 정하죠. 시즌 시작 전인 2~3월이 되면 스튜디오에서 리허설을 진행해요. 베테랑이라 할지라도 두세 번씩 스튜디오에서 1회부터 3회, 길게는 5회까지 녹화를 해서 모니터링하고 합평회까지 하죠. 단어 사용부터 광고 송출할 때 어떻게 말할 건지까지 하나하나 회의를 해요. 해설위원님들의 캐릭터에 맞춰 구성하는 편이죠.
Q. 마지막으로 월간내일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23년 동안 참 많은 사람에게 고마운 일이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은데요. 여태껏 가족과 회사, 사회에서 받아온 배려와 도움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전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서로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은 없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욱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중요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