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JULY / vol. 554
vol. 554
  • >
  • 희망일터 >
  • 인생 2막

서브메인이미지

새벽공기 맡으며 대형트럭 운전석에 오른 이인홍 씨의 표정을 본 사람은 단박에 알아챌 겁니다. 지금 이 순간, 그가 정말 행복하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거듭된 취업 실패로 낙담했던 이인홍 씨는 이제 즐거운 직업인이 되었고, 느리지만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무게중심을 옮기는 중입니다.
방향을 잡았으니, 이제 속도를 높여 나갈 차례입니다.

윤진아 / 사진이도영

모퉁이를 돌면 열리는 새로운 세상

사람이 변했습니다. 일 참 야무지게 잘하는 소년공에서 숙련된 배송기사로, 기꺼이 변화를 자처했습니다. 왕복 4시간 거리의 울진에 배송 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퇴근길. 이인홍 씨가 유년시절 아무 걱정 없이 뛰어놀던 경주 황성공원을 오랜만에 찾았습니다. 젊은 날 뜨거운 꿈은 접었지만, 새로운 열정을 품은 그의 심장은 이제 더 넓은 세상을 향합니다.

“어려서 부터 손기술 하나는 제가 친구들 중에서 제일 좋았어요. 열아홉 살에 작은 자동차 부품 업체에 들어가 철판 찍는 일을 시작했죠. 친구들은 다 학교 다니는데 혼자 공장에 나가는 현실이 내심 아프기도 했지만, 열심히 일을 배웠어요.”

스물여섯 살엔 섬유회사에 입사해 16년간 근무했습니다. 단순 생산직이었지만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했습니다. 요령 한번 안 피우고 늘 성실하게 제 몫을 해내는 청년에게 회사는 벤딩기 조작, 지게차 운전 등 하나 둘 새로운 업무를 맡겼습니다. ‘이인홍 씨 없으면 현장이 안 돌아간다’는 칭찬에 힘든 줄도 몰랐답니다. 그래서 더 상실감이 컸는지 모릅니다. 청춘을 바쳐 일한 회사가 문을 닫으면서 이인홍 씨는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막막한 마음을 다잡고 구직활동을 시작했지만 번번이 낙담해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알게 됐습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센터를 찾아가긴 했는데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요. 제가 워낙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거든요. 부끄럽지만 저는 글을 제대로 읽고 쓰지 못해요. 인터넷으로 취업 정보를 알아보는 것도 어렵고, 이력서나 자기소개서 쓰기도 쉽지 않죠. 운 좋게 서류가 통과돼도 면접에서 글을 잘 모른다고 하면 바로 탈락이었어요.”

배움도 짧고 이렇다 할 전문기술도 없다 보니 어느 것 하나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없었다는 이인홍 씨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그래도 일을 해야 하니 제발 도와주세요”라고 용기 내어 털어놓았습니다. 기본 자격도 안 되니 취업이 힘들다고 거절하면 어쩌나, 창피하고 걱정이 됐지만 경북동부경영자협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이정숙 컨설턴트는 당황한 기색 없이 오히려 이인홍 씨를 칭찬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불편한 점이 많았겠어요. 그런데도 오랜 세월 인정받으며 직장생활을 하셨다는 건 정말 대단한 거예요. 이제 저희가 알았으니 같이 노력해요. 아직 선생님을 알아보는 회사를 못 만나서 그렇지, 분명 꼭 맞는 인연이 나타날 겁니다.”

다시, 나를 찾아 나서다

  • 그날부터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와 함께 자신의 상황에 맞는 구체적인 취업 계획을 세우고, 일자리를 열심히 찾았습니다. 몇 번의 면접 기회도 생겼습니다. 적지 않은 나이, 글을 읽고 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여전히 걸림돌이 되긴 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이인홍 씨는 컨설턴트의 조언으로 생산직에 국한됐던 구직 범위를 배송·납품 운전직까지 넓혔습니다. 1종 대형 운전면허도 있고 건설기계 조정면허도 가지고 있으니 해볼 만하다는 조언에 용기가 났답니다.

  • “어찌 보면 저는 ‘안 되는 이유’가 참 많은 까다로운 구직자였어요. 그렇다고 그냥 포기하고 앉아있으면 누가 밥 먹여주나요?(웃음) 몇 번의 도전과 실패가 반복되던 중, 한 가스회사에서 LPG·고압가스용기 배송원을 구하고 있다는 연락이 왔어요. 배송처와 배송물품도 고정되어 있고, 출납기록을 하긴 하지만 어렵지 않아서 글을 잘 모르는 저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장거리 운전을 해야 하는 만큼 신체 건강한 사람을 원하는데, 제가 관련 면허도 있고 체격도 건장하니 딱 적임자라는 컨설턴트 님의 말에 용기가 났습니다.”

  • 심호흡 크게 하고 찾아간 면접장에서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적극적으로 추천했다는 면접관의 귀띔에 이인홍 씨는 그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면접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 출근하라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 “읽고 쓰는 데 부족함은 있지만, 누구보다도 성실한 마음과 강한 체력 그리고 끈기를 가진 사람. 그게 바로 저예요(웃음). 사는 내내 자존감이 바닥을 쳤었는데,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컨설턴트님이 설명하는 저는 꽤 괜찮은 사람 같더라고요. 약점보다는 강점에 집중하라고 독려하며 두 팔 걷어붙이고 도와 주신 덕분에 저에게 딱 맞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어요. 제가 원하는 분야에서 일하려면 어떤 지식을 습득하고 공부해야 하는지도 차근차근 알려주셨죠. 덕분에 미처 몰랐던 나의 역량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밥벌이의 즐거움

이인홍 씨는 요즘 4.5톤 배송트럭에 가스통을 싣고 전국을 누빕니다. 작년 봄부터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기 시작했으니, 어느덧 일 년 하고도 한 계절이 훌쩍 지났습니다. 몸은 좀 고되지만 마음만은 누구보다 행복하다며 “원래 운전하는 걸 좋아했던 나에게는 그야말로 천직!”이라고 힘주어 말합니다. 평소 이인홍 씨는 다른 기사들보다 먼저 출근해 일찍 하루를 연다는데요.

“가방끈도 짧고 기술도 부족하니 성실로 만회해야죠(웃음). 정해진 코스에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지만 하루하루가 감사합니다.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요. 내 직장이 있다는 게 이렇게 든든할 수가 없어요. 그 뿐인가요? 운전하면서 그날그날 미세하게 달라진 바깥 풍경도 구경하고, 내가 좋아하는 음악까지 듣고 있노라면 콧노래가 절로 나오죠.”

이인홍 씨의 내공은 날로 강해지고 있습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당당한 직업인이자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겠노라는 꿈은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묻고 답하는 동안 만들어졌습니다. 책 대신 공구를 들었던 10대 소년의 꿈에 20대 청년의 열정과 30대의 신념, 40대의 연륜이 보태져 삶을 한층 건강하게 만드는 원칙이 생겼습니다. 화양연화(花樣年華). 꽃처럼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뜻으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를 말합니다. 나이만큼의 속도로 세월이 흐른다는 데요. 열아홉 꽃 같은 나이에 공장 일을 시작해 이제 막 44km/h의 속도로 인생궤도에 진입한 이인홍 씨는 일하며 사는 매 순간이 화양연화라고 말합니다. 미숙했던 소년공 시절에도, 대형트럭을 몰고 유유히 전국을 누비는 지금도, 이인홍 씨는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기본을 잊지 않으며 삶을 바로 세우고자 노력합니다.

“다시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서 일할 수 있게 되어 그저 감사한 마음이에요. 몇 년 전의 저처럼 실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에게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어요. ‘포기하지 말고 줄기차게 도전하세요. 약점투성이 였던 저도 이렇게 당당하게 제 몫 하며 살고 있어요’라고요(웃음).”

알다시피 세상은 결코 녹록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믿고 싶지 않은 불행을 경험하기도 하고, 무기력함에 빠져 끝없이 나약해지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삶은 계속되고, 다시 일어나야 한다는 걸 말입니다. 인생의 바닥에서 새 희망을 찾았다는 이인홍 씨는 “세상에서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깨닫게 됐다”며 어깨를 활짝 폈습니다. 호되게 절망해본 덕에 삶의 의욕이 더 단단해 지고 낯모르는 사람들에게서 가슴 뭉클한 온기도 느껴봤으니, 인생이란 게 결코 손해만 보는 장사는 아니랍니다. 내 삶을 좀 더 나에게 맞추고 하루하루 더 좋은 에너지로 채워가는 2021년 여름. 새 직장에서 생긴 가장 큰 변화가 뭐냐고 묻는다면, 이인홍 씨는 이렇게 답하겠노라고 했습니다. “다시, 꿈이 생겼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