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인문학
우리 시대의 청백리
윤필상은 성종 때의 훈구 대신이다. 세조 때 본격적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한 승정원의 동부승지, 형방승지, 도승지를 역임하면서 치밀하고 빈틈없이 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윤필상에 대한 세조의 총애가 대단했다고 한다.
[자료 제공 국민권익위원회]
죄수와 형량을 낱낱이 기록하다
윤필상이 세종의 총애를 받게 된 계기가 있다. 그가 일찍이 형방승지로 재직할 때의 일이다. 당시에는 추운 겨울에 죄수가 얼어 죽는 경우가 많았는데 죽은 죄수의 신원을 파악하지 못해서 혼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죽은 죄수의 형량이 가벼운 경우에는 살아 있는 죄수와 형량이 바뀌는 경우까지 있었다. 윤필상은 감옥의 죄수들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게 되면서 서울과 지방에 있는 죄수들의 범죄 사항에 따라 경중을 낱낱이 조사하여 작은 책자에 기록해 두었다. 날씨가 매우 추웠던 어느 날 오경(五更)이 되었는데 내시가 임금의 명을 전하며 속히 입궐하라고 하였다. 윤필상이 의관을 갖추고 죄수를 기록한 작은 책자를 소매 속에 넣고 들어갔다. 세조가 침전(寢殿)의 창 안에서 "오늘 밤은 날씨가 매우 차서 더운 방에서 털옷을 겹쳐 입어도 견디기가 어렵다. 하물며 옥중의 죄수들이 이 혹독한 추위에 얼어 죽을까 염려가 되는구나. 먼 지방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지만 서울과 가까운 지방의 죄수 중에 가벼운 죄와 무거운 죄가 각각 얼마나 되는지 속히 기록하여 아뢰라."고 말하였다. 윤필상이 즉시 "신은 현재 형방승지로 있으므로 형옥에 관한 일은 신의 직분입니다. 항상 이를 기억하고 생각해 왔으므로 이미 그 숫자를 알고 있습니다."하고 작은 책자를 보고 낱낱이 헤아려 아뢰었다. 세조가 놀라고 기특히 여겨 창을 열고 침전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후 술을 내려 주고 중전에게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나의 보배로운 신하이다."라고 말하였다. 그 후에도 윤필상은 경상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릴 때 관아의 곡식을 풀어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을 뿐 아니라, 세금 혜택과 같은 제도를 만들어 백성들의 고통을 해결해 주는 선정을 베풀었다. 또한 함경도의 호족(豪族) 이시애(李施愛)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승지로서 토벌계획을 세우고 왕명을 신속히 처리한 공을 인정받아 우참찬이 되었고, 적개공신(난을 평정한 공신) 1등에 책봉되어 파평군에 봉해졌다. 그 후 윤필상은 승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성종 9년 11월에는 우의정에 올랐고, 이후 좌의정을 거쳐 성종 16년 3월에는 영의정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이후 그는 성종 대의 대표적인 재상으로 이름을 날렸다.
문신으로 전장에서도 입증한 능력
윤필상이 활약하던 당시에는 건주위의 여진족이 요동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중국 본토와 조선의 북방을 자주 침범하던 때였다. 이에 명나라는 건주위 정벌을 계획하고 조선에도 군대 파병을 요청하였는데, 윤필상이 서정도원수로 건주위 여진 토벌의 총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장수가 아닌 문신을 대장으로 삼은 것에 대한 반발이 만만치 않았다. 성종이 이를 묵살하고 윤필상을 보냈는데, 그는 반대를 무릅쓰고 파견이 된 만큼 일처리에 신경을 썼다. 행군할 때 장수와 군사를 부서별로 나누고 호령을 엄숙하고 분명하게 하여 명령을 어기지 않도록 하는 한편 군사기밀을 지키고 적용하는데 소홀함이 없었다. 마침내 그는 군사 5,000명으로 건주위 여진을 토벌하는 큰 공을 세워 대신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쾌거를 이루었고, 공을 인정받아 명나라의 표창도 받았다. 윤필상이 재상으로 있던 성종 대는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한 사림들이 훈구파의 부정부패를 비판하면서 중앙 정계에 등장하던 시기였다. 대부분의 훈구파가 사림들로부터 탄핵을 받아 입지가 좁아졌던 상황에서도 그가 무리 없이 15년이나 재상으로 관료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정치, 행정 분야에서 탁월한 업무능력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