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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인문학

토정 이지함은 1517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으며 화담 서경덕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결혼 후에 한강변에 흙으로 집을 지었는데 백성들이 이 집을 '토정'이라고 부르면서 이지함이 자신의 호로 삼았다. 토정비결은 이지함이 썼다는 설과 그의 이름을 빌렸다는 설이 함께 제기되고 있는데 19세기 후반에 토정비결이 널리 퍼진 점으로 볼 때 이지함의 이름을 빌렸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하지만 토정비결이 아니더라도 이지함은 유학, 천문, 지리, 산술 등 각종 학문에 조예가 깊었으며 사회개혁적인 모습도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자료제공. 국민권익위원회]

진보적인 관료로 실학의 단초 제공

평생 유랑을 하며 처사처럼 산 이지함은 그의 나이 56세인 선조 5년(1573)에 처음 관직에 나갔다. 당시 포천 현감을 맡았던 이지함은 얼마 안 있어 피폐해진 국가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농업뿐만 아니라 모든 산업을 골고루 발전시켜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포천현감 사직소를 올렸다. 상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매우 진보적인 것이었는데, 그는 구상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안까지 제시하였다. 『전라도 만경현의 양초(洋草)라는 곳을 임시로 포천현에 소속시켜 이곳에서 고기를 잡아 곡식과 바꿀 수 있도록 해 주소서. 또한 황해도 풍천부 초도의 염전을 임시로 포천현에 소속시켜 염전으로 활용하여 소금을 곡식과 바꾸면 이익이 많을 것이니, 시험해 보고 확대시킨다면 백성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이처럼 이지함은 어업과 염업의 이익을 활용해 백성들을 구휼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며 포천이 부유해지면 다른 읍에 이속시켜 백성들에게 혜택을 qp푸는 계획을 세웠다. 이 생각은 당시로서는 너무 급진적이라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후대의 실학자들에게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게 된다.

가난한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도록 걸인청을 짓다

이지함은 포천 현감을 사직하고 4년이 지난 후 아산 현감으로 다시 부임하게 된다. 하지만 그해 봄에 다른 고을에 흉년이 들면서 '모두 먹기패'로 불리는 부랑자들이 아산으로 몰려 들었다. 모두 먹기패란 고을에 흉년이 들면 양식이 남아 있는 집으로 몰려가 모두 먹어 버리고 그 집 식구들까지 같이 거지가 되어 이웃 고을로 몰려 가는 것으로, 대궐 앞까지 모두 먹기패가 몰려들어 나라가 걸인들 천지가 되었다. 이지함은 이를 방지하기 위한 대책으로 건물을 짓도록 명령한다. 걸인청을 만든 것이다. 그리고 걸인청에 거지들을 모두 모아놓고 흉년이 들었다는 핑계로 남의 밥을 빌어으면 게으른 습성만이 더해지니 자신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지함은 걸인청에 모여 든 병자는 새끼를 꼬는 등의 쉬운 일을 시키고 젊고 건강한 사람들은 땅을 개간하거나 고기잡이를 시켰다. 손재주가 좋은 사람에게는 도구를 마련해 주고 수공업에 종사하도록 했다. 이는 현대의 홈리스 재활센터와 같은 것으로 이지함의 실천적인 사고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이지함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장사하는 법과 생산 기술을 가르쳐 자급자족 능력을 기를 것을 강조했다. 가난한 주민들에게는 자신이 소유한 재물을 고르게 분배해 주었으며 무인도에 박을 심어 바가지를 만들어 내다 팔아 곡물과 교환하여 빈민을 구제하기도 하였다. 민생을 해결하는 것이 국가를 탄탄히 하는 길임을 일찍이 터득했던 이지함의 일화를 보면 책임지는 지위에 있는 관리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우치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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