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직업을 찾어서
작은 등에 노란불이 켜지고 불이 켜지는 대로 교환수는 잽싸게 [코오드]로 받아 그가 원하는 번호로 선을 이어주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 분 동안에 많을 때는 오, 육십 통화를 교환해야 하는데 여기에는 밝은 청각과 곱고 선명한 음성과 재빠른 솜씨가 필요하다.
― <동아일보> 1958년 12월 11일
자석식 단식교환기의 탄생은 마주 보지 않아도 소통할 수 있는 물꼬를 터줬습니다. 직접 만나지 않고 이야기가 가능하다니 당시로서는 놀라운 변화였습니다.
그런데 마주 보지 않아도 소통할 수는 있지만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바로 전화교환수의 역할이 중요한데요, 1902년 처음 등장한 전화교환수들은 목소리와 목소리를 이어주며 시대의 인연을 연결하는 메신저였습니다.
[글 이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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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소통의 시대를 열다
1896년 10월, 덕수궁에 우리나라 최초의 전화기가 설치되었습니다. 궁중에 3대, 각부에 7대를 비롯해 평양과 인천에 2대까지 모두 12개의 전화기가 놓이며 소통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직통으로 걸리는 통화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석식 단식교환기였기 때문에 중간에서 연결해주는 사람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수화기를 들면 회선에서 전류가 흘러 교환대에 설치된 램프에 불이 들어와 전화교환원을 호출하는 방식으로 통화가 이뤄졌지요. 전화를 걸기 위해 수화기를 들면 몇 번인지 묻는 전화교환원들의 목소리가 제일 먼저 들렸습니다.
신문물과 함께 등장한 유망직업
전화기라는 신문물과 함께 등장한 전화교환원은 당시 꿈의 직업으로 손꼽혔다고 합니다. 중앙전화국에 설치된 교환양성소에서 3개월 무료 수련을 받고 시험을 치른 후 적임증을 받으면 일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는데 교환양성소에 들어가기가 하늘에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고 합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15세에서 18세 사이의 여성이어야 하고 청각과 음성과 화술과 건강 부문에 모두 합격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발되는 과정의 까다로움에도 불구하고 응시 경쟁률이 어마어마했다니 당시 유망직업으로 불리기에 충분했을 거라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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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식 전화기의 등장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이렇게 인기 높은 유망직종이었지만 업무 환경은 선진적이지 못했습니다. 전화교환원 한 사람당 평균 250~300회, 분당 4~5회 전화선을 끊었다가 이어야 하는 고된 작업이 종일 이어졌다고 합니다. 또한 설비 부족으로 말미암은 연결 지연에 역정을 내는 사람은 물론 제대로 된 전화번호를 말하지 않고 지역과 이름만 대던 사람까지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업무적 역량은 점차 향상되어 전화번호를 외우는 능력 또한 전화선을 꽂는 손놀림만큼 능수능란해졌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전화 이용자 수가 늘어났고 1971년에 이르러서는 전화교환원 중개 없이 가입자가 직접 다이얼을 돌려 전화를 걸 수 있는 장거리 자동 전화가 처음으로 개통됐습니다. 자연스레 전화교환원이 하던 일은 자동 시스템으로 바뀌어 업무적 수요도 줄어들었지요. 돌아보면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던 그들의 노고가 있었기에 지금의 발전이 있지 않았을까요? 그들의 빛나는 노고를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