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2막
인생은 짧고 예술은 깁니다. 그래서 예술을 업으로 하는 사람의 인생이란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끄떡없이 이어집니다. 농익어서 더 맛있는, 제품 디자이너 양인석 씨의 예술 인생을 만났습니다.
글 임지영 / 사진 이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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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취업전선에 내몰리다
출고를 앞둔 매끈한 몸매의 광택 나는 운동기구들 사이에서 머리카락이 희끗한 중년 남성이 취재진을 반깁니다.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통해 제2의 삶을 시작한 제품 디자이너 양인석 씨입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사실, 그는 업계에서 알만 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디자이너였습니다.
“벌써 20년 전 이야기네요. 유명 가구회사에서 제품 디자인과 개발을 전담했어요. 아직도 그때 잡았던 제도판과 트레이싱지, 샤프펜슬의 촉감이 생생하죠.”
아날로그에서 온라인 시대로 급격하게 접어드는 시기, 당시 회사에서 CAD를 도입하자 달라진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해 밀려나는 디자이너들이 속출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남보다 한발 앞서 CAD를 습득한 혜안 덕분이었습니다. 선배들을 대상으로 CAD교육을 담당하기도 했는데요.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회사와 작별을 고합니다. 이만한 경력이면 더 큰 회사에서 더 큰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 있으리란 확신 때문이었죠. 하지만 그의 인생은 이때부터 롤러코스터를 타기 시작합니다.
“어딜 가도 잘해내리란 확신이 있었는데, 그때 IMF가 터졌어요. 대부분의 회사에서 인력감축을 감행했던 시기였죠. 그야말로 정글에 나온 기분이었어요.”
그나마 경력을 살려 학원 강사로 일하기도 했지만 벌이는 시원찮았습니다. 창업을 생각했으나 회복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시국을 무시할 수는 없었죠. 숱한 경험 끝, 나이 오십에 ‘취업전선’에 내몰릴 거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그는 고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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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순을 앞두고 이뤄낸 취업의 꿈
‘이왕 벌어진 일, 되짚어가며 아쉬워하기보단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쪽이 낫겠다’는 결론에 도달했을 때, 그는 이미 다양한 도전들을 하고 있거나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디자인과 무관한 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인생이 어디 마음대로랴’하는 마음으로 현실에 만족했죠. 물론 디자이너의 삶이 갑자기 멈춰버린 것에 대한 미련은 늘 마음 속 깊은 곳에 상처처럼 남아있었지만요. 그런데 정말이지,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가 ‘왕년의 양인석’을 되찾아 줄 거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나 같은 중년을 누가 써줄까 싶었지만, 초년생의 마음가짐으로 파주센터에서 운영하는 생애경력설계서비스에 참여했어요. 특화 프로그램인 물류창고관리원 과정에도 참여해 지게차 운전 자격증을 취득했죠. 그런데 마음이 헛헛했어요. 디자인에 대한 열망이 차라리 식어버리면 좋겠는데, 그러질 않더라고요.”
한 번 사는 인생 ‘이번이 마지막 도전이다!’라는 결심으로 하고 싶은 일에 매진하기로 마음먹은 그는 역시 ‘인생은 끝까지 가봐야 안다’는 명언을 되새기게 됩니다. 다시는 없을 것만 같던 ‘기회’라는 것이 그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죠.
“운동기구를 개발하고 제조, 판매하는 회사에서 CAD 디자인 분야 인력을 뽑는다고 하더라고요. 주춤거릴 이유가 없었어요. 제가 제일 잘하는 일이잖아요. 혹시 ‘나이가 많다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세상에! 채용 기준이 만 50세 이상 경력자라지 뭡니까. 누가 봐도 제가 딱이었죠.”
직업인으로 인정받으며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마음이 닿는 곳에 길은 열리는가 봅니다.
양인석 씨도 회사도 서로를 한 눈에 알아봤으니까요.
그의 재취업을 물심양면 도와준 징검다리 제도는 만 50세 이상 경력자를 채용한 기업에게 정부가 지원을 해주는 ‘신중년 적합 직무제도’입니다.
“나이 많은 직원을 채용해도 괜찮을까, 싶어서 처음엔 반신반의했는데요. 경력을 꼼꼼히 확인해보니까 왜 이제야 나타나셨을까 싶을 정도로 전문성이 보이더라고요. 무엇보다 일하고자 하는 열정도 인상 깊었고요.”
양인석 디자이너의 새 직장 ‘카르도’ 대표는 요즘 나이 많은 신입사원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습니다. 수작업으로 디자인하던 시절 다져진 기본기를 주춧돌 삼아, 원가절감부터 인원구성까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충전 받고 있으니까요. 출근한지 이제 겨우 6개월 차에 접어든 신입사원에게 ‘디자인 기술개발 이사’라는 직함이 어색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기회고 원했던 일이라 일에 대한 자신감과 열정이 마구 넘치네요. 저는 아직도 하고 싶은 게 많은 사람이에요. 그간 숙원이었던 독일어 공부도 틈틈이 하고 있고요. 당장 연말에는 아마추어 보디빌더 대회에도 나갈 생각이에요. 희끗한 머리요? 멋있지 않나요?”
인생에 쌓인 경력을 회사가 믿어주면, 중년의 나이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휙 날아가 버리는 것 아닐까요? 그간 쌓아둔 크고 작은 노하우를 아낌없이 나누고, 동시에 열심히 배우고 싶다는 그의 삶에는 20대 청년은 가히 흉내도 내지 못할 커다란 열정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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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보다 훨씬 나이 많은 신입사원을 뽑는다는 게 이상했지만, 면접을 보는 순간 알아봤습니다. 진짜 전문가가 우리 회사에 왔다는 걸요. 나이 어린 상사를 생각보다 잘 모셔(?)주셔서 감사드리고, 큰형처럼 분위기도 잘 이끌어주셔서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덕분에 우리 회사 홍보도 이렇게 할 수 있네요!
독자 여러분, 저희는 운동기구를 만드는 ‘카르도’입니다! 많은 사랑 부탁드립니다!
-카르도 곽창희 대표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