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

무림지존, 취업준비생이 되다
7화. 담기만 한다고 그릇이 넓어지는 건 아니더이다.

등장인물

주인공 무명선사

: 구파일방의 태두, 소림사의 방장이자 무림의 지존. 무림의 앞날을 결정짓는 마교와의 대격전 중 적의 사술에 당해 우연찮게 차원을 이동하여 현실 세계 오게 된 무림의 지존. 현실 세계에 도착한 첫날, 오덕오와 만나게 되어 그의 도움으로 현실 세계에 적응해 나간다.
무림으로 회귀하길 희망하지만, 당장 마땅히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 오덕오에게 신세를 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폐를 끼칠 수는 없다고 취업에 도전한다.

주인공 오덕오

: 평범한 30대 초반의 취업준비생. 우연찮게 만난 무명대사가 무공이 깊은 무림인이라는 걸 알게 되고, 무명을 이용해 자신의 막힌 기혈을 뚫을 계획으로 그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한다.
당장 갈 곳이 없는 무명을 이종격투기 선수로 데뷔시키고 자신은 그의 매니저가 되길 희망하지만 그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버지 오동팔

: 오덕오의 아버지. 오십 대 중반의 남성. 베테랑 보험영업사원이지만, 몇 년 전부터 다이렉트 보험의 대두로 늘 불만을 안은 채 살고 있다. 입에 달고 사는 말은 ‘오늘 하루만 더 버티자.’
덕오가 데려온 무명을 처음에는 의심하지만, 그가 제자들의 이름을 다 외우기 힘들 정도라 하고, 속세의 지인들이 전부 각 문파의 수장들이란 이야기를 듣고서는 극진히 대접하게 된다. 의리를 최우선으로 하는 무명이 고향으로만 돌아가게 되면, 줄줄이 사탕으로 지인들을 죄다 엮어서 계약을 넣겠다는 속셈이다.
덕오가 데려온 무명을 보고, 덕오가 따로 말하지 않더라도 덕오와 무명이 절친한 사이일 것이라 생각하고 무명에게 배움의 기회를 제공한다.

7화. 담기만 한다고 그릇이 넓어지는 건 아니더이다.

글. 문수림

작은 변화들이 하나하나 자리를 찾아 일상이 되는가 싶더니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무명은 처음 한 달은 여러모로 애를 먹나 싶더니 어느새 수업 종강에 이를 때쯤이 되어서는 하나의 프로그램이 아닌, 컴퓨터 자체와 굉장히 가까워져 있었다. 고작 3개월의 시간이었다.

“내가 직접 이걸 옆에서 다 지켜봤다지만, 하, 진짜 어이가 없네.”


“무엇이 말이오?”


“아니, 백지 상태에서 3개월 만에 컴퓨터, 스마트폰이랑 친해지고, 게다가 이제는 직접 홈페이지도 하나 꾸려보시겠다고요? 그게 말이 됩니까? 어째 갓난 애기들이 말 배우는 것만큼 그리 쉽게 뚝딱뚝딱 한답니까?”


“뭐, 그만큼 잠을 제대로 못잔 것도 사실이잖소?”


“아니, 그건 새벽에 폰으로 드라마를 봐서 그런 거잖아요? 무슨 스님이 드라마를 그렇게 좋아해? 그것도 멜로드라마를!”


“멜로드라마야 말로 K-드라마의 선봉장이 아니오? 여기에 세상만사와 희로애락이 몽땅 다 들어있으니 내게 이보다 좋은 교재가 없소. 덕분에 이곳의 생활도 이렇게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던 거고. 그러니 한국의 멜로드라마야 말로 저의 참스승이라 할 만하오.”


덕오는 등을 돌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네, 네, 어련하시려고요. 그나저나 홈페이지는 만들어서 뭐 하게요? 바로 다음 과정의 수업을 들어도 빠듯하실 텐데.”


덕오의 말에 무명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물론, 궁극적으로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K-디지털기초역량훈련의 교과들을 하루빨리 익히는 게 맞소. 그래야 내 안에서도 충분히 개념이 바로 잡히고 시야가 교정되어 이후 심화과정의 내용들도 빠르게 익힐 수 있겠죠. 다만, 급하다고 뭐든 채워 넣기만 해서는 곤란합니다. 어차피 그 많은 걸 내 안에 한 번에 다 담을 수는 없다는 게죠.”


“이번에도 역시나 뭔가 말씀은 그럴싸하시네요. 근데 그거 아십니까? 머리 좋아서 공부 잘하는 애들은 몇 시간이고 책상 앞에 앉아 있을 수 있지만, 보통 열등생들은 책상보단 다른 곳에 앉아서 시간을 보내죠. 예를 들어, 컴퓨터 앞이나, TV 앞이나, 야외 벤치나, 그마저도 피곤하면 방바닥에 드러눕기도 하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그건 편견이외다. 우등생이라고 해서 책상 앞에만 있는 것은 아니오. 더 정확히는 책상 앞에 앉아 있다고 해서 그들이 우주까지 다녀오지 않는다는 건 아니라는 거요.”


“우주요? 화성, 목성, 달나라 말할 때 말하는 그 우주? 이건 또 무슨 엘런 머스크 겨드랑이 긁는 소리예요? 민간인 우주관광이란 말이 나왔다고 해서 그걸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책상 앞에 앉아서 공부만 하는 애들이 우주를 다녀와요? 하긴 눈 감고 졸면 달 뒷면에 있는 것처럼 아주 그냥 새까맣기는 하겠다.”


덕오의 비아냥거림을 듣고도 무명은 빙그레 웃어만 보일 뿐 달리 대꾸하지는 않았다. 그저 다시 조용히 자리에 앉아 폰을 꺼내 들고 멈췄던 드라마를 다시 재생시켰을 뿐. 덕오는 그런 무명이 못마땅하여 등을 돌려 앉았다.

무명과 함께 북한산을 다녀온 이후로 마음에 안정을 찾고 다시 부족한 부분들을 채우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지만, 여전히 취업이 뜻대로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덕오가 마냥 여유로울 수는 없었다. 그런 덕오의 눈에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습득하는 무명이 매 순간 좋게만 보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 지금 우주 타령이나 실컷 해두라고 해. 어차피 제대로 된 이력 없이는 결코 취업이 쉽지 않을 테니까. 진짜는 그 때가서야. 살살 꼬셔서 같이 UFC로만 가면 끝난다고.’


덕오가 등을 돌리자 무명은 보던 드라마를 멈추고 폰을 내려놓았다.

“우리가 함께 산을 오르고 내린지도 꽤 되었죠? 어떤 것 같습니까? 이전보다 정신이 맑아진 것 같지 않습니까? 집중도 잘 되고요. 옆에서 제가 지켜보기에도 이젠 기가 흐트러지는 경우도 적어진 것 같군요. 아무래도 이종격투기로 데뷔한다 같은 생각은 확실히 덜 하시는 것 같군요.”


덕오는 방심하던 중에 허를 찔려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머리가 맑아지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게 그렇다고 진짜 기혈을 뚫어주고 계신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데 이종격투기는 또 무슨 헛소리에요?”


“헛소리가 아니라, 최근 동영상 시청 기록에 더는 그 UFC의 영상이라는 게 올라오지 않아서 하는 말이오.”


“하, 내 계정을 공유해준 내가 등신이지! 아니, 제가 필요한 정보나 검색하라고 알려준 거지, 내 사생활 엿보라고 알려준 건 아니잖아요!”


“허허허, 엿보다니 그건 당치도 않소. 어디까지나 알고리즘의 안내였다오. 뭐, 그리고 내가 기혈을 뚫어주지 않는다는 것도 틀린 말이오. 산을 올라서 정신을 맑게 하는 건 그러기 위한 시작의 첫 단추니까요.”


덕오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또 변했다. 수치심을 완전히 씻어낸 반가움의 화색이 만연했다.

“그럼, 이제 저도 기혈을 뚫려서 무공 같은 것도 익히고, 공부도 잘하게 되고 그런 건가요?”


“단련을 바탕으로 막힌 기혈을 뚫는 것과 무공을 익히는 건 완전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먼저 무공을 오랜 시간 연마해온 입장에서 그건 결코 권하고 싶지가 않군요.”


“아니, 왜요? 제가 보니까 주먹이나 발길질에 공력 밀어 넣는 것하고, 그 보법인간 뭔가에 공력을 실을 수만 있다면, UFC에서 바로 짱 먹을 수 있지 싶은데? 말씀드렸잖아요, 그거 챔피언 한 번만 해도 제 인생, 팔자가 확 바뀔 수 있다니까요!”


“처사님의 말씀처럼 공력을 밀어 넣을 수 있다면, 그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르지요. 그렇다면 반대로 상대 선수가 그럴 경우는 상상해 보신 적이 없으십니까? 제가 보니 출전하는 선수들은 확실히 의식을 하고 익힌 것은 아니지만, 다수의 인원이 시합 중 순간적으로 공력을 분출하는 것을 보았소. 뭐, 그런 게 전혀 아니더라도 기본적인 공력을 실어 넣기 위한 수련만 하더라도 어쩌면 또 반평생이 걸릴지도 모르죠. 유감스럽게도 처사님에게서는 재능이 전혀 느껴지질 않으니까요.”


“허얼.”


덕오는 기가 차서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무술에 재능이 없다니… 상상해 보지 못한 발언이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배우고 익히기만 하면, 오래 걸려도 1, 2년이면 흉내 정도는 충분히 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무려 반평생을 고스란히 바쳐도 될지 안 될지 알 수가 없다고 하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낙심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처사님은 확실히 익힌 지식이 많아 머리를 써서 일을 함에 매우 능숙하니까요. 다만, 본인이 제대로 소화해보려 한 적이 없어서 본인의 실력과 잠재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을 뿐. 그래서 오늘 저는 처사님에게 기본적인 내공 운영을 보여드릴까 합니다. 물론, 이 역시도 저처럼 하려면 반평생이 더 걸릴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이건 괜찮습니다. 처사님은 이미 많은 지식을 머리에 담아둔 터라 조금만 수련하여도 아주 큰 성과를 보실 수 있을 테니까요.”


덕오의 얼굴은 이미 다시 모든 빛을 잃고 냉소적인 의심으로만 가득했다.

“시작에 앞서 노트북을 켜서 메모장을 열어주시겠습니까? 제가 명상에서 깨어나면 바로 타이핑을 할 수 있도록 말이죠.”


말을 마친 무명은 덕오를 기다려주지 않고 바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단전에 기(氣)를 모았다.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자 순식간에 무명의 머릿속에서 지난 수업 내용들의 복기가 이루어졌고, 연이어 다시 머릿속이 텅 빈 도화지처럼 비어지나 싶더니 이내 그림을 그리듯이 빠르고 경쾌하게 그가 원하는 홈페이지를 그려내기 시작했다. 그것도 단순히 이미지를 그려내는 것이 아니라, 선 하나를 그어도 그에 맞는 CSS 명령어를 정확히 떠올려 선 옆에 적어두는 식이었다.

‘지금은 디자인을 화려하게 입히는 게 중요한 게 아니지. 그러니 상단 메뉴는 간략히 border 명령어를 써서 틀을 잡은 표식 정도로만 해두자. 그러니 값은 대략 border: thick double; 정도로만 해도 되겠지. 그래도 너무 휑하면 구분이 어려울 수 있으니 테두리 색은 파란색으로 일단 해두자 border-color:blue; 아, 이렇게 나눠서 쓰면 행간만 늘어나니 우선은 깔끔하게 한 줄로 엮어서 표기를 바꿔두자. 그래도 메인 페이지는 역동성을 살려둬야 하니 Java Script 오픈소스를 끌어오자. 그리고 단색 이미지 파일 몇 개를 만들어 교차됨을 보여주자. 그렇게 해두면, 이후에는 잘 꾸며진 디자인 이미지로 파일을 덮어씌우기만 하면 될 테니. 그러려면…’


실로 놀라운 경지였다. 살아오면서 전혀 사용해 본 적이 없었던 언어를 정확히 사용하여 형태를 구현해 내는 작업을, 그것도 PC 앞에서 시행착오를 반복하며 구현하는 게 아니라, 앉은 자리에서 명상을 하며 스스로 시뮬레이션을 해낸다는 것은 일반적인 인간으로는 도저히 꿈도 꾸지 못할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었다. 이미 무명은 단순히 무공이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러 막힘이 없는 자가 되었으나, 무명 스스로는 그런 세세한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는 오로지 현재의 배움을 즐겼고, 지금처럼 배움을 직접 구현해 내는 것에 큰 기쁨을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그래, 이 정도 기틀을 잡을 수 있다면, 이제 PC를 이용해 나머지 과정까지 진행한다면, 능히 나의 온라인 명함 정도는 내가 만들 수 있겠구나. 그렇다는 건 내가 나를 스스로 알릴 수 있는 기본이 되었다는 소리고, 넓게는 기업이 대중에게 다가갈 수 있는 첫 걸음이 완성된 거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호흡을 마치고 눈을 뜬 무명의 몸에서는 급격히 쏟아진 땀이 식으며 하얀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명은 그 자리에서 그대로 노트북에 손을 뻗어 막힘없이 웹언어를 타이핑하기 시작했다.

덕오는 처음 오 분 정도는 속는 셈 치고 기다려봤지만, 다음 십 분 간은 순전히 본인의 의지였다. 무명이 몸에서 내뿜는 열기로 방안이 달구어지는 것을 보고 견디며, 그의 전신에서 흘러내리는 땀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상상하느라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모른 채였다. 그러다 무명이 눈을 뜨고 갑자기 막힘없이 타이핑하는 것을 보게 되자 저절로 턱이 벌어지고 말았다.

“아니, 이게… 저, 정, 정말 가능한 겁니까? 지금 그 짧은 시간 동안 이걸 다 암산(暗算)하듯이 정리했다가 쏟아내고 있다고요? 정말?”


“제대로 구현되었는지 확인해 봐야 정확히 알겠지만, 맞습니다. 제가 명상을 통해 제 안의 거울을 마주하고 거기서 익힌 걸 구현하는 연습을 해보았습니다. 물론, 저라고 해서 이게 단번에 가능했던 게 아닙니다. 오늘 처사님에게 보여드리고자 그간 매일 잠들기 전에 지금의 수련을 했었습니다. 배운 걸 복기하며 익히는 시간을 가졌던 거죠. 다만, 일반인들과 달리 전 그 시간의 깊이가 조금 더 농밀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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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오는 순식간에 가득 채워지고 있는 무명의 메모장을 보며 강한 충격과 함께 좌절감을 느꼈다.

‘내가 내 밥그릇도 제대로 못 챙기면서 이런 천재를 옆에 둬서 뭘 어쩌자는 거지? 게다가 난 무공이란 것에도 재능이 없다며? 당장 저 양반은 이제 UFC 같은 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먹고살고도 남을 기세고… 하, 정말, 뭘 어쩌자는 거야?’


덕오의 마음 속 어둠이 한층 더 짙어졌다. 무명은 그런 덕오의 내적 변화를 놓치지 않고 들추었다.

““또 기(氣)가 흐트러지시는군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가 결코 단 하루 만에 이렇게 된 게 아닙니다. 모두 주변의 도움 덕이었고, 끊임없이 배운 걸 소화하고자 한 노력의 결과입니다. 사실 오늘 이 모습을 보여드린 건 처사님에게 희망을 드리고자 했던 겁니다. 냉정하게 처사님은 무술 쪽으로는 전혀 재능이 없으십니다. 그렇지만, 말씀드렸다시피 처사님은 확실히 많은 지식을 쌓으셨습니다. 본인 그릇을 넘어설 만큼의 양이죠. 문제는 본인이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상태라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요. 저처럼 배운 것을 익히고 소화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지는 않았으니까요.”


“하, 솔직히 뭐라고 답할 기운도 없군요. 제 그릇이 그렇게나 작았습니까? 들을수록 전 평범 이하네요. 이러니 줄줄이 낙방만 했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큰 그릇입니다. 다만, 그런 큰 그릇마저 넘을 만큼의 양을 담고, 또 담으셨던 겁니다. 소화도 시키기 전에 계속 담기만 하니 어떤 그릇이든 한계가 오고, 그렇지 않아도 약한 기의 흐름이 더 약해질 수밖에요.”


말을 마친 무명이 덕오에게 다가와 그의 자세를 고쳐 잡아주었다. 허리를 곧게 펴고, 가슴을 내밀고, 단전에 손을 모르게 하는 모습이 조금 전 무명 자신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담기만 한다고 그릇이 넓어지는 건 아닙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K-멜로드라마를 너무나 아낀다지만, 그렇다고 몰아보기에 전력을 다하지는 않습니다. 하루에 늘 정해진 만큼만 보고 있죠. 그게 왜 그럴까요? 한 번에 몰아서보면 흔히들 말하는 진도는 단박에 다 뺀다지만, 그 시간을 들여 본 내용들이 한 장면도 빠짐없이 다 제 머리에 그대로 남아있을까요? 절대 그렇지가 않죠. 제가 보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짚어보고, 그 상황을 다시 상상해 보고, 나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지 고민도 해보고, 그러면서 인물들의 전후 맥락을 다시 들여다봤을 때나 오롯이 재미도 느낄 수 있고, 장면들 하나하나가 기억에 오래 남게 되죠.”


무명의 손짓을 따라 호흡을 가다듬으며 덕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처사님이 하시는 공부라는 것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경쟁에 떠밀려 진도만 빼려고 들어서는 원하는 결과를 취하기가 힘듭니다. 모름지기 학문이란 그런 게죠. 맥락을 이해하고, 세상 만물의 흐름과 얼마만큼 맞닿아 있느냐 하는 고민도 필요하죠. 그런 전체적인 시간이 소화의 시간이라는 겁니다. 그래야 흔히 말하는 현장 실무에서도 배우고 익힌 것을 바로 활용해낼 수 있는 법이고요.”


덕오는 무명의 안내대로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며, 마음속으로는 그간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을 떠올려보았다. 마구잡이로 이미지들이 뒤엉키는 가운데 그토록 늘지 않았던 영어가 가장 크게 그려졌다.

“호흡은 멍하니 앉아서 시간을 죽이는 게 결코 아닙니다. 조용히 앉아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관해 고민해 보는 시간이죠. 그 과정에서 떠오르는 모든 생각들이 다 쓸모가 있습니다. 쓸모없는 물음은 없습니다. 모든 물음이 이해의 과정, 소화의 과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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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마친 무명은 자리에서 일어나 스마트폰을 꺼내 영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무명입니다.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전화를 드렸습니다. 제가 방금 정리한 메모장 파일을 처사님에게 메일로 보내드렸습니다. 보시고 평가를 해주셨으면 해서요. 그 정도면 이제 제가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되겠는지요?”


무명의 통화소리는 덕오의 귓가까지 날아왔지만, 덕오의 신경까지 가서 닿지는 못했다. 덕오는 그간 풀리지 않았던 문제들을 정리하고 되짚어보느라 모든 정신이 오로지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을 뿐이었다. 때문에 자신의 몸에서 점차 뜨거운 열기가 솟구치고 있다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를 못했다.

덕오의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린 땀방울이 그의 매끈한 콧잔등까지 가볍게 미끄러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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