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의 시간
막연히 사장을 꿈꾸던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기술로 바람을 이루려 노력했고, 표면처리 업계의
‘꾼’으로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표면처리 직종 명장으로 우뚝 섰습니다.
기양금속공업(주) 배명직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글 윤진아 | 사진 이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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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인의 길’을 발견하다
배명직 대표는 1959년, 경상북도 예천의 한 시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쌀밥조차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궁핍하던 시절이었죠. 그 무렵 태어난 사람들이 으레 그렇듯, 배명직 대표 또한 가난에 굶주려야 했습니다. 솟아날 구멍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고, 낙심한 그는 조금씩 엇나가기 시작했죠. 놀고 싸우는 데 빠져 살다 보니 어느새 고등학생이 됐다는 그는 문득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지?’라는 고민과 함께 덜컥 겁이 났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때 마침 담임 선생님이 자격증 공부를 권하셨어요. 노력 끝에 화학분석기능사 2급 자격증을 땄는데, 자격증 시험에 합격하고 보니 ‘나도 하면 되는구나!’라는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이를 계기로 기술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죠.”
고등학교 졸업 후 여러 공장을 전전하다 1977년 방위산업 도금업체에 취업한 그는 입사 1년 만에 계장으로 승진합니다. 고졸 사원 가운데는 아무도 이루지 못한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이었습니다.
“되짚어 보면 운명 같은 시작이었어요. 지금까지 줄곧 방위산업 표면처리를 주된 업으로 삼고 있으니 말이에요.”
공장 한편에 라면박스를 깔고 숙식하며 일할 정도로 도금 기술을 익히는 데 사활을 걸었다는 배명직 대표. 그는 초고속 승진 이후 기술‧생산‧총무‧구매‧영업‧품질관리 등 공장 내 모든 부서를 돌아다니며 기업 운영에 필요한 실무를 두루 익혔습니다. 소년 시절 품었던 ‘사장’이라는 꿈이 그의 마음속에서 생생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던 겁니다.
열정과 용기로 일군 전화위복
그야말로 미친 듯이 일하던 어느 날, 뜻밖의 일이 닥쳤습니다. 모든 것을 바쳤던 공장이 한순간에 부도를 맞은 것입니다. 여느 사람 같으면 망연자실할 만한 어려움이었지만, 그는 오히려 위기 앞에 당당했습니다. 이참에 창업을 하기로 마음을 굳힌 겁니다. 그렇게 배명직 대표는 1983년, 27세 나이에 명일금속을 설립하며 사업의 첫걸음을 뗐습니다. 2년 뒤에는 삼원금속의 대표로 취임하며 세를 불렸고, 자신이 세웠던 명일금속을 흡수 합병했습니다.
“거칠 것 없이 성장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군포시에 있던 공장은 금세 수주량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가 됐고, 안산도금단지를 세우고자 도금업체 대표 12명과 힘을 합쳐 공사에 돌입했죠. 그런데 돌연 신축공장이 압류됐습니다. 알고 보니 사업 초기 얼떨결에 해줬던 채무보증이 말썽을 일으켰던 거였죠. 그간 이룬 것들을 모두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기도 했지만, 지인들의 도움으로 겨우 기사회생했고 공장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최대의 위기를 넘긴 그는 ‘다시 떨치고 일어난다’는 의미를 담아 사명을 ‘기양금속공업(주)’으로 변경하고 다시금 방위산업 표면처리에 매진했습니다. 1992년 회사를 법인으로 전환했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에 매달린 끝에 흔들리지 않는 성공가도에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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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전 DNA’로 명장에 올라서다
주변에서는 겨우 30대 초반에 성공을 거둔 그를 ‘남부러울 것 없겠다’며 치켜세웠지만, 정작 본인 자신은 여전히 배고픔을 느꼈습니다. 그 정체는 바로 ‘배움’이었습니다.
“오랫동안 실전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배웠기 때문에 기술 부분에서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실전 기술을 뒷받침할 이론적 지식이 부족하다는 점은 늘 가슴 한편을 무겁게 했어요. 정부기관이나 방위산업체 담당자와 소통할 때면 알고 있는 것들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애를 먹곤 했거든요.”
고심 끝에 늦깎이 대학생이 되기로 결심, 35세가 되던 1994년 그는 인천의 한 전문대 표면처리과에 입학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늦은 나이에 대학교에 입학하는 일이 흔치 않았습니다. 회사 운영과 학업 병행이 쉽지 않았지만, 타는 목마름으로 누구보다 열심히 공부했어요. 덕분에 2000년과 2001년에 특수도금기능사와 전기도금기능사 자격증을 땄습니다. 나아가 세 번의 도전 끝에 표면처리기능장의 자리에도 올랐고, 한국산업기술대학원 신소재공학과에 진학해 석사 학위도 받았습니다. 일단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이 빛을 발한 순간이었죠.”
불타는 학구열로 이론과 실력을 겸비한 배명직 대표는 명실공히 우리나라 표면처리 업계의 선두주자로 올라섰습니다. 2007년 3월 제8호 기능한국인에 선정됐고, 그해 11월 고용노동부로부터 ‘표면처리 직종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최고의 직함도 받았습니다. 그는 “도전을 망설였다면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 이라고 단언합니다. 거친 세월을 정면돌파하며 뼛속 깊이 새긴 ‘도전 DNA’가 그를 명장의 길로 이끈 셈입니다.
끝없는 발전을 꿈꾸다
도전은 배명직 대표의 운명인가 봅니다. 명장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여전히 성장하는 앞날을 꿈꿉니다. 2007년 비싸게 주고 산 유명 독일제 칼이 6개월 만에 녹스는 걸 보고 ‘내가 가진 표면처리 기술로 녹슬지 않는 칼을 만들겠다’고 다짐했고, 자신의 이름을 건 주방용품 브랜드 ‘골드 마이스터’를 만들었습니다. 여러 제품 중에서도 티타늄‧순금으로 표면처리를 하고 세라믹으로 코팅한 뒤 은나노 물질을 첨가한 ‘불멸의 황금칼’은 녹슬지 않고 항균력도 뛰어난, 표면처리 기술의 정수를 유감없이 선보인 대표적 제품입니다.
“골드 마이스터의 성공과 함께, 후학 양성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대학교와 고등학교 교수로서 후배들을 직접 가르치고 있고, 현재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기능한국인회의 장학금 규모도 키웠습니다. 스스로 ‘기술인 성공의 본보기’가 됨으로써 더 많은 인재들을 기술의 세계로 초대하는 것, 이것이 저의 마지막 소임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기술인이 꿈을 품으면 ‘꾼’이 되고, 자연스럽게 더 높은 꿈을 꾸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며 진화하면 명장의 영예와 성공은 단지 시간문제에 불과합니다. 꿈꾸는 꾼이 됨으로써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해낸 배명직 대표. 그는 기술인 후배들이 점점 더 많아져서 우리나라가 ‘기술 초강대국’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랍니다. 그때까지 그도 열심히 꿈꾸고, 꿈꾼 만큼 성실하게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는 여전히 끝없는 발전을 꿈꾸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