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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인문학

우리 시대의 청백리

박규수는 조선 말기의 문신이자 개화사상가로 북학파의 거두인 박지원의 손자이다. 가세가 어려웠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주로 아버지 박종채에게 수학하였는데, 할아버지인 박지원의 『연암집』을 통해 실학적 학풍에 눈을 떴고, 윤종의, 남병철, 김영작 등 당대 일류 학자와의 학문적 교류를 통해 실학적 학문 경향을 한층 심화시켰다.
[자료 제공 국민권익위원회]

개화 운동의 스승

박규수는 익종(효명세자)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익종이 제 뜻을 제대로 펴지도 못하고 급서하자 박규수는 18년이나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1848년 박규수의 나이 42세 때 증광별시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하고 이듬해 12월 첫 관직으로 사관원정언에 제수되었다. 1851년 중앙 관직으로 돌아와 축적한 학문 실력을 선보이기 시작한 박규수는 1856년 일어난 애로호 사건과 관련하여 중국 황제의 문안 사절로 중국을 방문하기도 한다. 그는 중국에서 국제 정세의 흐름을 목격하였고 심병성 등 8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 교류를 통해 견문을 넓힐 수 있었다. 1862년 2월에는 진주 민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에 임명되었는데 이로 인해 그가 국내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박규수는 본격적인 출세가도를 달린다. 고종은 익종의 양자로 왕위를 계승하였기에 익종과 친분이 있었던 박규수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대왕대비 조씨 등 풍양 조씨의 후원 속에서 박규수는 사헌부 대사헌, 홍문관 제학 등을 거쳐 이조참판이라는 요직에 제수되었다. 1864년 비변사당상 지위에 오른 박규수는 여러 관직을 거친 후에 천주교 탄압이 극에 달했던 1866년 돌연 외직인 평안도관찰사에 제수되었다. 그가 평안감사로 있을 당시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고종의 승인 아래 제너럴셔먼호 격파에 공을 세운다. 그리고 1869년 다시 중앙으로 복귀하여 중국 사행길에 오르는데, 그때 박규수는 중국 문인들과의 교류에 큰 공을 들였고 양무 운동이 전개되던 중국에서 북학을 계승 발전한 개혁 사상을 발전시켰다. 귀국 후 그는 흥선대원군에게 개국의 필요성을 여러 차례 역설하였으나 뜻대로 실현되지 못하자 1874년 9월에 사직하고, 국정의 제일선에서 물러나 제자 양성에 힘썼다. 이 시기 그가 사랑방에 출입하는 젊은 양반 자제들에게 『연암집』을 강의하기도 하고 중국에 내왕한 사신이나 역관들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을 전수함으로써, 개화운동의 선구적 인물들이 그 속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자주적 개국을 주장하며 무력 충돌도 불사한 박규수였지만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의 일방적인 체결을 보며 크게 실망하다 고희를 갓 넘긴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손해를 볼지라도 한 점 부끄러움 없게 처신한다

박규수는 관직에 재임하는 동안 우의정까지 올랐지만 그의 집은 몹시 빈한했다. 계동에 있던 그의 옛집은 가난하고 권력 없는 선비가 살았던 집 같았는데 뜰 앞에 소나무 한 그루가 있어 박규수의 맑은 풍모를 생각나게 했다고 한다. 그가 평안감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박규수가 평안감사로 가 있는 동안 그의 부인이 봉록 남은 것을 모아 토지 3백 석을 사둔 것이 있었는데, 박규수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박규수에게 호소하였다. "공의 부인께서 사신 땅은 제가 먼저 샀던 것입니다. 원래 땅 주인이 악한 마음을 먹고 제게 땅을 팔고 나서, 저도 모르게 그 땅을 또 공의 부인에게 돈을 받고 판 것입니다." 박규수가 놀라서 부인에게 물으니 봉록 남은 것으로 토지를 사 두었다고 말을 하였다. 그러자 박규수는 "그대의 땅인 것을 우리 집에서 잘못 샀다."고 말을 하며 땅문서를 불살라 버렸다. 흥분한 부인이 땅을 판 자를 찾아 내 땅값을 다시 내놓으라고 하겠다고 하자 박규수가 조용히 말했다. "부인, 그러지 마시오. 내가 관찰사직을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부인이 토지를 샀으니 비록 남은 봉록으로 땅을 샀다고 하나 백성들이 나를 어떻게 여기겠소. 또 어찌 정승이 되어 백성과 송사로 이익을 다툴 수 있단 말이오." 박규수는 빈한한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백성과 다투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의 부인은 남은 봉록을 모아 토지를 샀으니 한 점 부끄럼이 없으나 그는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의혹조차 피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높은 관직에 있는 박규수로서는 거짓 사기로 토지를 판 사람을 찾아내 처벌하고 돈을 돌려받는 일이 결코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정승으로서 백성의 땅을 사들이고 그것으로 재산을 불리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던 것이다. 현재 가회동 헌법재판소가 있는 자리가 박규수의 집이 있던 자리이며 헌법재판소 안에 있는 늙은 백송이 그의 집 마당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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